전삼용 요셉 신부님 | 두 번째 결혼으로 두 배 더 멀어지는 행복, 연중 제7주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5 02 28
[두 번째 결혼으로 두 배 더 멀어지는 행복] 연중 제7주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5 0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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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다해 연중 제7주간 금요일 – 두 번째 결혼으로 두 배 더 멀어지는 행복
결혼은 우리 모두의 화두입니다. 누구나 태어나면 결혼을 할 것인지, 아닌지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25살까지는 결혼하고 싶었고, 그 이후에는 결혼에 대한 희망을 품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재혼을 반대하시는지를 살짝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결혼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명확히 하시며, 결혼이 단순한 인간의 합의가 아닌,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신성한 결합임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의 대화 중, 결혼의 파기 불가능성을 강조하시며, “사람이 부모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다.”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합니다. 예수님은 또한 이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이 맺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지 말라.”는 교훈을 주십니다.
물론 두 번째, 세 번째 결혼해도 잘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첫 번째 결혼을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두 번째도 그렇게 믿기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짐 엘리엇과 그의 친구들의 순교’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짐 엘리엇과 그의 친구들은 1950년대 중반, 에콰도르에서 원주민 부족인 아우카 부족과의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짐 엘리엇은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내와 어린 자녀가 있었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이 그의 삶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었습니다. 결국 짐 엘리엇과 그의 네 명의 동료는 아우카 부족원들에 의해 순교하게 됩니다.
이 사건에서 중요한 점은 짐 엘리엇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엘리엇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남편이 순교한 후에도 복음을 전하기 위한 사명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라며, 자신이 남편과 함께했던 사역을 이어가며 원주민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남편의 순교가 하느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믿고, 그 뜻을 따라갔습니다. 그녀의 삶은 결혼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졌을 때, 그 결혼이 얼마나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예입니다.
짐 엘리엇과 그의 친구들이 순교한 뒤, 그들의 아내들은 고통을 겪었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그 고난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고통과 희생은 단지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속 계획의 일환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혼이 하느님의 뜻에 맞게 이루어졌을 때, 그 결합은 시간이 지나면서 큰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남편의 순교 후에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큰 영적 열매를 맺은 인물입니다.
짐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찾은 ‘행복’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분명 남편과 함께 자녀를 키워가며 느낄 수 있는 행복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남편과 같은 선교의 길을 감으로써 남편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남편은 하느님이 맺어주신 사람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죽었어도 더는 결혼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불행했을까요? 엘리사벳의 말을 들어봅시다.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짐 엘리엇의 순교 이후,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어가면서 “내 삶을 목적과 의미 있는 것으로 살아가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는 그녀가 자신을 중심으로 한 세속적인 행복을 추구하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선택한 결과임을 나타냅니다. 그녀는 자주 “행복은 세상적인 기준에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서 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남편 짐의 순교 후에 겪은 고통 속에서도 “기쁨과 슬픔 중에서 선택해야 했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녀는 이 슬픔을 통해 고통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에서 진정한 기쁨과 평화를 찾았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그녀의 삶이 전적으로 외적인 쾌락이나 행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를 추구했음을 보여 줍니다.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짐 엘리엇의 순교 이후 “다시 이 길을 가야만 한다면, 그 길을 계속 걷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평생 자신이 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의 죽음을 통해 얻은 경험과 교훈들이 자신을 더욱 성숙시키고 하느님을 더 깊이 신뢰하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엘리자베스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믿었으며, 고난과 아픔을 통해 그 믿음이 더욱 확고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은 모든 것을 주실 만큼 충분히 가치가 있다, 심지어 슬픔까지도.”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그녀가 고난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추구한 삶의 자세를 나타냅니다.
저도 누군가를 사랑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한 경험들이 결혼의 경험과 비교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러한 경험이 사제생활을 하는 데 방해가 될까요?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묵상해볼 수 있었습니다. 내가 상대에게 잘못 했던 것, 상대가 나에게 잘못했던 것, 내가 상대에게 잘했던 것, 상대가 나에게 잘했던 것 등은 모두 내가 하느님께 가는 길에서 큰 묵상 거리였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귀중한 다리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만큼이라도 예수님을 사랑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행복은 인간적인 관계에서 오는 것이라기보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행복해지면 인간적인 관계에서 더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행복을 위해 하느님께서 맺어주셨다는 믿음을 포기하게 된다면 그 하느님께 참아나가며 나아가야 하는 길을 외면하게 되고 다시 살게 되더라도 그 믿음을 쉽게 회복할 수 없게 됩니다. 첫 번째가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는데, 두 번째가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기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포기하고 싶었지만, 끝까지 결혼의 유대를 유지하며 참사랑을 알게 되고 그 참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했음을 깨달은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토비트서에서 토비아와 사라의 혼인은 이런 면에서 큰 의미를 줍니다. 토비트는 결혼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이를 위해 하느님 자비를 청합니다. 십자가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결혼의 참 의미는 하느님께 가는 길이라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아멘.